글자로는 다 담을 수 없는 그날의 기억을 육성으로 듣습니다.
영웅들의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지금, 그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 주세요.
1932년 경북 경주 천북면 청령리에서 태어난 공우섭은 일제강점기 ‘내선일체’ 교육과 신사참배 등 황국신민화 교육을 받으며 성장하였다. 아버지가 동네 이장을 맡아 사소한 민원까지 처리하던 유복한 가정 환경 속에서 자란 그는 경주중학교에 진학하여 학업을 이어갔다. 중학교 시절에는 좌우익 이념 대립으로 시가행진에 참여하거나 경찰 조사를 받는 등 혼란한 사회 분위기를 경험하기도 하였다.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하자, 그는 8월 대구 수성국민학교에 위치한 제5교육대대에 입대하여 정식 군번을 부여받고 훈련을 받았다. 일주일간의 짧은 교육 후 조교로 차출되어 신병들을 가르치던 중, 어느 날 밤 비상 소집을 통해 전선으로 투입되었다. 그가 도착한 곳은 당시 대구 방어의 사활이 걸린 낙동강 방어선의 최대 격전지, 다부동 가산 전투 현장이었다.
가산 8부 능선까지 오르며 인민군과 200미터도 안 되는 거리에서 대치했던 그는 빗발치는 총탄 속에서 밤낮으로 호를 파며 생사의 고비를 넘겼다. 미군과 한국군이 뒤섞여 후퇴와 전진을 반복하던 긴박한 상황 속에서도 그는 군인 정신으로 자리를 지켰다. 이후 1952년 육군학교를 거쳐 1953년 1월 소위로 임관한 그는 포병 관측장교로서 서부전선과 동부전선을 누비며 인해전술로 밀고 내려오는 적군에 맞서 포병 화력을 지원하였다.
전쟁 후 1955년 제대한 그는 공직 생활을 거치며 성실히 삶을 일구었다. 그는 후배 학생들에게 "자신만의 전문 분야를 갖추고 열심히 노력하라"는 당부와 함께, 고난의 시대를 자부심으로 이겨낸 학도병의 역사를 증언하였다.